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프리 초서 (문단 편집) == 업적 == 그가 살았던 [[플랜태저넷 왕조]] 시기 잉글랜드는 총 3가지 언어가 통용되는 나라였다. * 왕실 언어인 [[노르만어]]. 노르만족인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으로 즉위한 이래 노르만계가 지배층이 되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왕실 및 귀족들의 언어로 정착했다.앵글로-노르만어라고도 불렸던 이 언어는 북유럽계 바이킹족이었던 노르만족이 프랑스 지역을 점령한 뒤 프랑스-라틴문화에 동화되어 형성된 변형 프랑스어였고 이 언어를 쓰던 노르만족이 잉글랜드를 점령해, 15세기 말엽까지 잉글랜드 고위층의 언어로 쓰였다. * 학술 언어인 [[라틴어]]. 이 당시엔 지식인들의 언어였다. * 하층 언어인 [[중세 영어]]. [[에드워드 3세]]가 "제발 고위층도 영어 좀 쓰자. 그리고, 의회에서도 영어 써." 라는 칙령을 반포한 적이 있는데 그 칙령부터도 앵글로-노르만어로 되어 있었다. 또 잉글랜드 왕으로 영어로 읽고 쓸 수도 있었던 [[헨리 5세]](하층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한다는 건, 충분히 이례적인 일이었다)가 또다시 영어 진흥책을 추진하지만 이번에도 성과가 미미했다. 잉글랜드의 고위층이 본격적으로 영어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은 백년전쟁에서 패하여 [[칼레]]를 제외한 유럽 대륙의 영토를 모두 잃게 된 후의 일.[* 그 뒤 노르만족이 완전히 잉글랜드 사회에 동화됨에 따라 당시 잉글랜드 교회에서 쓰던 교회 라틴어와 더불어 그들이 쓰던 노르만어도 현대 영어 성립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고대 영어에 교회 라틴어를 더해 노르만어를 첨가하면 현대 영어가 완성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을 정도이다.] 당시 잉글랜드는 유럽의 변방이자 2등국가였고, 한창 문화의 꽃을 피우던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문학 수준의 발끝의 때만도 못한 문학 수준을 갖춘, '별볼일 없는' 문화의 나라였다. 노르만의 지배이후 플랜태저넷 지배시기를 거쳐 변형 프랑스어였던 노르만어가 잉글랜드의 공식어가 되어 거의 300년간 궁정은 물론 공식문서에서 노르만어가 사용되었고, 천한 하인계층이나 쓰는 중세영어로 수려한 문학을 쓰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초서는 그의 실무적, 외교적 능력뿐 아니라 학자로서의 소양에도 충실했다. 유년기에 다양한 언어를 접하며 살아왔고, 이탈리아나 프랑스로 자주 여행한 것은 언어적 능력을 기반으로 해당 국가의 선진적인 문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초기 그의 문학적인 관념은 조국의 하층계급 언어였던 영어가 아닌, 궁정에서 통용되는 프랑스 문학에 치우쳤다. 그는 노르만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당시 중세영어보다는 자신의 모어였고 잉글랜드 고위층의 언어였던 [[노르만어]]와 가까운 [[프랑스어]]로 쓰인 프랑스문학이 접근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프랑스 문학을 영어로 번역하려는 시도까지 했을 정도. 그는 관례의 일환으로 종종 고위계층을 찬양하는 시를 헌정해 올리기도 했다. 이탈리아로 긴 여행을 떠난 뒤에는 여러 문학을 접하며 Troilus and Criseyde 등 꿈 형식의 장시를 쓰기도 했는데, 이런 업적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살아생전 그는 상기의 프랑스 문학이나 라틴 번안작 등을 자신의 최고 작품으로 여겼으나, 아직까지도 그를 위대한 영문학인으로 칭송받게 하는 건 말년에 쓴 [[캔터베리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